여시아문
씨는 뿌린대로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12. 16. 16:09
여러분 안녕하세요.
희망과 가슴벅찬 환희로 맞았던경인년의 한해도 이제 며칠후면 보내야 될것 같군요. 흔히 우리는 세월의 무상과 덧없음을 입버릇처럼 말합니다만 이무상한 세월속에서 경인년 일년을 보내면서 우리는 무엇 을뿌리고 무엇을 거두었는지 한번쯤은 정리해 보아야 되지 않을까요? 과연 지금의 내가 서있는 자리는 꼭 있어야 할 곳에 자리하고 있는지. 있어야 할 곳에 똑바로 있는 그 물건과 사람. 있는 자세 그것이 문명이며 번영이며 그 것이 또한 행복이리라 하는 생각을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씨를 뿌리면 싹이돋고 싹을 잘 간수하면 순조로이 성장합니다. 씨가 좋으면 그 나무가 좋고 꽃이 좋고 결실이 좋은 것입니다. 사람을 나무에 비유하여 지혜가 탁월하고 따라서 덕성이 훌륭한 사람을 보리수 나무에 비긴 예를 우리는 불교의 초기 경전들에서 발견 합니다. 그리고 그 보리수의 씨는 마음입니다. 사람의 일생은 씨에서나아 씨가 되는 과정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아닐것입니다. 아직 이세상에 태어나기전 아니 태아로서 어머님 뱃속에 들기 이전과 이후에 그 무엇이 달라졌는가 를 생각해 봅시다.
그것을 달리 말하면 나 의식 이전과 나 의식 이후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는 차이입니다. "나" 라는 존재는 씨를 근본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씨는 땅위에 떨어져 적당한 온도와 수분과 양분이 주어지는 조건하 에서만 뿌리를 내릴수 가있습니다. 씨는 하나의 의지이며 말과 표정도 없이 위로 하늘을 향해 뻗으려하고 밑으로는 땅속에 넓게 뿌리 박으려는 생각을 잠시도 쉬지 않고 있는 의지이며 힘 입니다. 그러나 씨는 조건이 나쁘면 연분을 얻지 못하고 말라 죽어 버리는 운명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마음의씨라고 일컷는 것은 그 마음이 이와 같이 연분을 만나면 가지 가지의 형태로 그 모습을 세상에 나타내 성장과 변화의 여러 과정을 겪은다음 결실을 보게하는 힘을 가진 까닭인 것입니다.
꽃이나 나무의 씨와 사람의 마음 씨 와의 차이는 전자가 단순히 자동적이며 일방적인 외지와 힘으로 나타나는데 비해 후자는 이러햔 경향이 없진 않지만 그 의지와 힘 조차도 바꿀수 있는 자유로운 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고 이 의지는 언제나"나" 라는 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점입니다.어머님 뱃속에 있었던 그 옛날의 나와 50대의 "나" 의 차이는 몸집의 모양과 크기의 차이만이 아니라 나의 자각과 의식의 크기가 다르다는 데에 더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나무는 이를태면 나의 이식 "나" 라는 자각의 나무라고도 할 수가있을 것이기 때문이죠. 가을에 피는 코스모스와 20세기를사는 인간이 나같이 나무라고 보고 비유해 봅시다.
근본적인 차이는 엮시 자유의지의 유무 대소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코스모스를 고속도로의 주변에다 심을 수가있지만 코스모스가 인간을 여기 저기에 퍼뜨릴 수는 없지요.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과학 문명의 위력을 증대한다 하더라도 코스모스의 씨앗을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코스모스에게도 자아의식 개체의식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햇빛은 고맙고 눈바람은 싫은 것입니다. 조건이 좋기만 하다면 아름다운 꽃들을 연이여 피우고 자기 성장의 의식을 줄기차게 가지고 있는 거겠죠. 그러나 코스모스는 추하게 웃는 버릇이 없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요구하는 것이 없습니다, 어디에끼든지 코스모스는 부드럽게 해줍니다, 그 생명은 순조롭게 자라서 코스모스로서의 할 일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무데에서나 있어서 좋은 코스모스, 이에 비하면 인간은 추한 나무일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나무를 더럽게 하는 것이 우리의 잘못된 자기 주장이며 방자한 생각들입니다, 그 자리에는 있지 말아야 할것이 끼어 들때에 조화는 깨지고 위험은 따르고 파괴가 생기고 마는 거겠죠, 어차피 일정한 시기를 살면 그 형태를 거두게 마련인 것이 이 세상 모든 것들의 운명입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므로 하여 그 생명을 다하고 그 구실을 다하고 태연히 가버리는 저 소박한 지혜를 품은 대자연의 아들 딸에게서 인간은 많은 것을 배워야 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나는 의상실의 쇼 원도우에 비처진 세대를 보고 슬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치 빠리에라도 온 것 같은 인상을 늘 주는데 왜 슬프냐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화려한 의상들이 얼마나 많은 주부와 처녀들에게 알맞는 분수일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하루를 살다가 죽어 버리더라도 갖은 호사를 다해 보겠다는 마음씨도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가정이고 사회고 민족이고 나라고 그것이야 어찌되건 그리고 인생의 도리 사람으로서의 몸가짐 마음가짐의 원적이야 어덯든 지폐나 수표만 생긴다면 그리하여 관능의 쾌락이 얻어진다면 무슨 일이든 서슴치 않으리라 그 방자한 마음씨 그 패륜의 마음씨 그 정욕의 마음씨 그 철없는 마음씨 그것이 어떤 문화어떤 생활 풍조를 낳을지도 모르다면 그 개인과 가정과 사회가 맣하는 날이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씨는 뿌린대로 거두게 마련입니다, 피를 심고 벼가 거두어지기를 바랄수는 없습니다.처음에 잘못 뿌려진 씨에서 좋은 결실을 바라서는 안되겠죠, 우리는 고속도로 변에 코스모스의 씨를 뿌리면 아름다워 지는 줄을 알 득이 소나무숲도 가꾸고 키우면 나라의 힘이 원천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 서로 협조하는 마음 씨워에 좋은 지도력이 작용될 때 길이 열린 다는걸 잊지 말아야 하겠죠 불란서 사람이 되는 건 좀더 나중으로 미루는 것이 우리의 분수가 아닐까요, 분수에 맞게 사는 것을 부끄렵게 여기는 마음씨는 부정과 부패의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씨앗을 뿌리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성불 합시다.
희망과 가슴벅찬 환희로 맞았던경인년의 한해도 이제 며칠후면 보내야 될것 같군요. 흔히 우리는 세월의 무상과 덧없음을 입버릇처럼 말합니다만 이무상한 세월속에서 경인년 일년을 보내면서 우리는 무엇 을뿌리고 무엇을 거두었는지 한번쯤은 정리해 보아야 되지 않을까요? 과연 지금의 내가 서있는 자리는 꼭 있어야 할 곳에 자리하고 있는지. 있어야 할 곳에 똑바로 있는 그 물건과 사람. 있는 자세 그것이 문명이며 번영이며 그 것이 또한 행복이리라 하는 생각을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씨를 뿌리면 싹이돋고 싹을 잘 간수하면 순조로이 성장합니다. 씨가 좋으면 그 나무가 좋고 꽃이 좋고 결실이 좋은 것입니다. 사람을 나무에 비유하여 지혜가 탁월하고 따라서 덕성이 훌륭한 사람을 보리수 나무에 비긴 예를 우리는 불교의 초기 경전들에서 발견 합니다. 그리고 그 보리수의 씨는 마음입니다. 사람의 일생은 씨에서나아 씨가 되는 과정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아닐것입니다. 아직 이세상에 태어나기전 아니 태아로서 어머님 뱃속에 들기 이전과 이후에 그 무엇이 달라졌는가 를 생각해 봅시다.
그것을 달리 말하면 나 의식 이전과 나 의식 이후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는 차이입니다. "나" 라는 존재는 씨를 근본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씨는 땅위에 떨어져 적당한 온도와 수분과 양분이 주어지는 조건하 에서만 뿌리를 내릴수 가있습니다. 씨는 하나의 의지이며 말과 표정도 없이 위로 하늘을 향해 뻗으려하고 밑으로는 땅속에 넓게 뿌리 박으려는 생각을 잠시도 쉬지 않고 있는 의지이며 힘 입니다. 그러나 씨는 조건이 나쁘면 연분을 얻지 못하고 말라 죽어 버리는 운명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마음의씨라고 일컷는 것은 그 마음이 이와 같이 연분을 만나면 가지 가지의 형태로 그 모습을 세상에 나타내 성장과 변화의 여러 과정을 겪은다음 결실을 보게하는 힘을 가진 까닭인 것입니다.
꽃이나 나무의 씨와 사람의 마음 씨 와의 차이는 전자가 단순히 자동적이며 일방적인 외지와 힘으로 나타나는데 비해 후자는 이러햔 경향이 없진 않지만 그 의지와 힘 조차도 바꿀수 있는 자유로운 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고 이 의지는 언제나"나" 라는 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점입니다.어머님 뱃속에 있었던 그 옛날의 나와 50대의 "나" 의 차이는 몸집의 모양과 크기의 차이만이 아니라 나의 자각과 의식의 크기가 다르다는 데에 더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나무는 이를태면 나의 이식 "나" 라는 자각의 나무라고도 할 수가있을 것이기 때문이죠. 가을에 피는 코스모스와 20세기를사는 인간이 나같이 나무라고 보고 비유해 봅시다.
근본적인 차이는 엮시 자유의지의 유무 대소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코스모스를 고속도로의 주변에다 심을 수가있지만 코스모스가 인간을 여기 저기에 퍼뜨릴 수는 없지요.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과학 문명의 위력을 증대한다 하더라도 코스모스의 씨앗을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코스모스에게도 자아의식 개체의식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햇빛은 고맙고 눈바람은 싫은 것입니다. 조건이 좋기만 하다면 아름다운 꽃들을 연이여 피우고 자기 성장의 의식을 줄기차게 가지고 있는 거겠죠. 그러나 코스모스는 추하게 웃는 버릇이 없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요구하는 것이 없습니다, 어디에끼든지 코스모스는 부드럽게 해줍니다, 그 생명은 순조롭게 자라서 코스모스로서의 할 일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무데에서나 있어서 좋은 코스모스, 이에 비하면 인간은 추한 나무일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나무를 더럽게 하는 것이 우리의 잘못된 자기 주장이며 방자한 생각들입니다, 그 자리에는 있지 말아야 할것이 끼어 들때에 조화는 깨지고 위험은 따르고 파괴가 생기고 마는 거겠죠, 어차피 일정한 시기를 살면 그 형태를 거두게 마련인 것이 이 세상 모든 것들의 운명입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므로 하여 그 생명을 다하고 그 구실을 다하고 태연히 가버리는 저 소박한 지혜를 품은 대자연의 아들 딸에게서 인간은 많은 것을 배워야 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나는 의상실의 쇼 원도우에 비처진 세대를 보고 슬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치 빠리에라도 온 것 같은 인상을 늘 주는데 왜 슬프냐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화려한 의상들이 얼마나 많은 주부와 처녀들에게 알맞는 분수일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하루를 살다가 죽어 버리더라도 갖은 호사를 다해 보겠다는 마음씨도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가정이고 사회고 민족이고 나라고 그것이야 어찌되건 그리고 인생의 도리 사람으로서의 몸가짐 마음가짐의 원적이야 어덯든 지폐나 수표만 생긴다면 그리하여 관능의 쾌락이 얻어진다면 무슨 일이든 서슴치 않으리라 그 방자한 마음씨 그 패륜의 마음씨 그 정욕의 마음씨 그 철없는 마음씨 그것이 어떤 문화어떤 생활 풍조를 낳을지도 모르다면 그 개인과 가정과 사회가 맣하는 날이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씨는 뿌린대로 거두게 마련입니다, 피를 심고 벼가 거두어지기를 바랄수는 없습니다.처음에 잘못 뿌려진 씨에서 좋은 결실을 바라서는 안되겠죠, 우리는 고속도로 변에 코스모스의 씨를 뿌리면 아름다워 지는 줄을 알 득이 소나무숲도 가꾸고 키우면 나라의 힘이 원천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 서로 협조하는 마음 씨워에 좋은 지도력이 작용될 때 길이 열린 다는걸 잊지 말아야 하겠죠 불란서 사람이 되는 건 좀더 나중으로 미루는 것이 우리의 분수가 아닐까요, 분수에 맞게 사는 것을 부끄렵게 여기는 마음씨는 부정과 부패의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씨앗을 뿌리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성불 합시다.